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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s 직관적 인터페이스는 오직 젖꼭지 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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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에 쓴 예전 블로그 글을 옮겨왔다)

직관적인 인터페이스(UI)라는 표현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직관성과 친숙함 #

매킨토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Jef Raskin은 직관적(intuitive)이라는 표현이랑 친숙하다(familiar)는 표현이 같은 것이니 앞으로는 친숙하다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직관적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장치들이 사실은 직관적이지 못하다. 컴퓨터 마우스가 직관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 특정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직관적인 경우는 해당 인터페이스가 기존에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무언가와 유사하거나 동일할 때 뿐이다. 짧게 말해서, 이러한 맥락 하에서 ‘직관적’이라는 말은 ‘친숙한’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인 것이다.

Many claims of intuitiveness, when examined, fail. It has been claimed that the use of a computer’s mouse is intuitive. Yet it is far from that. … it is clear that a user interface feature is "intuitive" insofar as it resembles or is identical to something the user has already learned. In short, "intuitive" in this context is an almost exact synonym of "familiar."

Jef Raskin과 비슷한 입장을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 중에 직관적 인터페이스는 오직 젖꼭지 뿐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저기에서 제법 자주 접하는 주장이다:

직관적 인터페이스는 오직 젖꼭지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학습된 것이다.

The only "intuitive" interface is the nipple. After that it's all learned.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의 대표주자로 보이는 마우스. 그 마우스 조차도 모두 학습된 친숙함일 뿐 직관과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자주 소개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가 마우스라는 것을 처음 보고서는, 마우스를 입에 가져가더니 “컴퓨터, 컴퓨터”하며 음성인식기로 착각하더라는 그럴듯한 일화(스타트랙 에피소드)나, 조이스틱은 써봤으나 마우스를 처음 접한 사람이 마우스를 손에 들고 공중에서 이리저리 휘두르거나 뒤집어서 트랙볼처럼 볼을 움직이더라는 이야기(이건 Jef Raskin이 겪은 실화) 등이 유명하다:

나는 이런 주장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서 ‘직관성은 본능, 친숙함은 학습’이라는 식의 구분은 본성(nature)과 학습(nurture)의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생각하고, ‘직관적이라는 표현을 친숙함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기에 빈서판(blank slate) 미신을 더해놓은 것이라고 본다.

나는 위 마우스 이야기에서 학습된 친숙함 말고도 건질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Jef Raskin의 글을 조금 자세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들이 직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터페이스는 사실 대부분이 직관적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경험(넓은 의미의 학습)을 통해 친숙해진 것이다. 마우스 예시 두 가지.
  2. 한편 인터페이스가 크게 개선될수록 기존의 직관적인(즉 친숙한) 인터페이스와 큰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라서 사람들은 개선된 인터페이스에 대해 '직관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내릴 것인데 이는 인터페이스 개선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3. 직관적이라는 표현이 단지 친숙함이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 개선된 인터페이스에 대한 거부감을 낮출 수 있었다.
  4. 학문적으로 엄밀한 논의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직관적'이라는 표현 대신 '친숙함'이라는 표현을 쓰도록 하자.

어떤 의도인지 충분히 이해는 된다. 특히 대세인 WIMP(windows, icons, menus, pointer)와 극단적으로 다른 방식인 THE(The Humane Environment) 같은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그의 입장을 고려하면 더욱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해가 되고 유용한 주장이 항상 맞는 주장인 것은 아니다(물론 반대로, 사실 관계만 따졌을때 맞는 주장이 모든 상황에서 항상 유용한 주장인 것도 아닐테다. 옳다(right)와 유용하다(useful)를 구분하는 것은 유용하다).

일단 위 주장은 대체로 빈서판 미신을 가정하고 있다. 즉 인간은 백지 상태(빈서판; blank slate)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무언가에 친숙하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과거의 경험(넓은 의미의 학습)을 통해 그 무언가에 관련된 것을 익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도달 가능한 결론은 한가지 밖에 없다: 세상에 진정으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젖꼭지 뿐이며 모든 컴퓨터 인터페이스(인공적 인터페이스)는 학습을 통해 친숙해진 것일 뿐이고, 따라서 직관적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으니 그 대신 친숙함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식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으로 타당하지도 않으며, 공부/현업을 하는 입장에서 때론 그리 유용하지 않다.

빈서판 미신 #

인간은 젖꼭지 물기 이외에도 많은 본성을 타고난다. 한마디로, 빈서판 미신은 틀렸다.

단적인 예로 위에서 언급한 마우스 사례들에서 사람들은 난생 처음보는 마우스를 손에 잡았다. 발로 찰 수도 있었고, 입에 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손에 어떻게 잡았을까도 생각해보자. 인간의 손은 특이한 엄지손가락의 구조 등으로 인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물건을 잡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손에 대한 오덕질의 결과로 만들어진 손이 지배하는 세상을 추천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우스를 엄지와 집게를 이용한 "두 손가락 잡기"로 잡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마우스를 잡기에 적당한 악력은 누구에게 배웠을까? 로보틱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건의 무게나 질감이나 강도에 따라 해당 물건을 쥐기에 적절한 악력을 주는 로봇 손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마우스의 모든 면이 직관적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우스의 어떤 측면은 분명 직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성과 학습의 잘못된 이분법 #

본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면 두번째 함정이 기다리는데 바로 본성과 학습의 구분에 기반한 용어 정의이다.

이 틀에서는 직관이란 인간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혹은 소위 유전자에 쓰여진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고 친숙함이란 그외에 학습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식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학습과 본성을 칼 같이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인간은 많은 본성을 타고나기도 하지만 본성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환경적 요인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학습)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이다. 본성에 기반하지 않은 학습이란 없으며, 학습에 기반하지 않는 본성이라는 것도 없다. 본성과 학습은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있다. 이와 관련하여 Matt Ridley의 본성과 양육(Nature via Nurture)라는 책을 추천한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란 모든 인간은 자기가 속한 지역의 언어를 문제없이 구사한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일까, 학습에 의한 것일까? 답은 "두 가지 모두"이다.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기 위한 능력을 본능적으로 타고나며 이러한 본능에 적절한 외부 자극(즉 학습)이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 그래서 직관성이란? #

이러한 관점에서, 인터페이스의 직관성은 얼마나 쉽게 '친숙함'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으냐, 즉 학습용이성(learnability 혹은 easy-to-learn)과 같은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틀에서 보자면 학습용이성은 인터페이스가

  1. 인간 보편적 본성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2. 기존에 사용자가 이미 학습한 지식/습관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3. 얼마나 빠르게 습관형성을 유도하는지

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관점은 빈서판 미신이나 학습과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분법과 달리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과도 잘 부합되며, 친숙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직관적인 인터페이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제시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장점은 대다수의 인터페이스/인터랙션 디자이너가 현재 등한시하고 있는 영역을 명확히 비추어준다는 점에 있다. 디자이너들은 특정한 지역의 문화라거나, 학습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들에 대해서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탐구, 본성과 학습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행동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부를 하지 않는데, 이러한 공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의 습관화라는 용어는 일상용법와 심리학용어 사이의 차이로 인한 혼란이 있는 것 같아서 습관형성으로 모두 수정하였다)


이 글에 대하여 아이추판다님이 상세한 의견+반론을 적어주셨다: 직관적 인터페이스 (2012/11/11)

위 의견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직관적 인터페이스에 대한 부연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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